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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밤만큼은 이대로 춤출 수 있길

 싸우는 것 이외의 모든 일은 하등 의미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에서, 한 전사가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날짜의 구분도 시간의 흐름도 이미 존재 의의를 잃은 지 오래인 세계. 달빛이 대지를 날카롭게 찌르고 별빛이 그 상처에 파고들듯 반짝이는 것이 명명백백한 밤이었으나, 이제 와서 낮인들 어떻고 밤인들 어떨까.
우수에 젖을 기억조차 가지지 못한 전사의 발걸음은 무겁다. 철갑옷의 소리가 밤공기마냥 온몸을 짓누르는 가운데 땅을 긁는 구두의 마찰음은 아랑곳 않고 전사를 어떠한 곳으로 이끈다. 전사는 그저 자신을 이끄는 불가사의한 감각에 모든 정신을 맡긴 채다. 평소와 달리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적도, 누구의 통제도 없이 유유히 필드를 돌아다니다 갑작스레 시비를 걸어오는 이미테이션들도 없는 이 밤이 너무도 낯설지만 어째서인지 그다지 수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꿈인 것일까? 꿈일지도 모르겠다.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한가하게 꿈이나 꾸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퍽 우습다고 생각할지도.
언제나와 같이 곧은, 그러나 약간은 비틀거리는 걸음이 한참을 이어진다. 그리고 어떠한 균열 앞에서 돌연 멈춘다.
 
균열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서면 마치 우주와도 같은 풍경이 전사를 반긴다. 지평선도 땅의 깊이도 하늘의 높이도 가늠되지 않는 새까만 공간. 그리고 그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하얀 빛무리들. 마치 반딧불 같은 것들이 암흑 속에 흉터처럼 박혀있다. 전사의 벽청색 눈이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한가득 담아낸다.
그때 암흑 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와줬구나."


낯익은 음성에 전사가 고개를 든다. 장밋빛 머리칼의 가진 여인이 전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라이트닝."


무사했군, 여인의 실루엣을 확인한 순간 스친 안도감을 여과 없이 내뱉는다. 전사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어느 순간 제자리에 멈춰버린 여인의 앞으로 이번에는 전사가 발걸음을 옮긴다.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 균열 속이 어두운 탓일까? 목소리와 윤곽으로 그녀를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살필 수는 없었다. 표정을 바라보려 하면 흐릿하게 흩어지는 시선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사는 그녀가 누구인지만 알 수 있으면 되었다고 생각해버린다. 상대가 적이었다면 표정을 살핌으로써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테지만, 동료는 본디 얼굴을 마주하기보단 등을 맞대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구태여 시선을 둘 필요는 없다, 라고 여기며 넘겨버린다. 그런 전사의 모습을 보며 여인은 조용히 손을 내민다. 곧 전사가 손을 맞잡아오자 여인은 손목을 비틀어 깍지를 끼고 팔에 약간 힘을 주며 전사의 몸을 당겨온다. 누구의 손길에도 절대 휘둘리지 않을 법한 이 전사조차 그녀의 손길에는 자신의 몸을 맡길 뿐이다.
머잖아 여인의 다른 팔이 전사의 어깨 위에 가볍게 놓인다. 그에 화답하듯 전사의 다른 팔이 여인의 등을 받친다. 전사의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본 여인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느릿 동작으로 몸을 돌린다. 전사와 여인, 그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엇 하나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도를 이해한 듯 숨소리조차 섞이지 않은 조용한 왈츠가 한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문득, 여인이 입을 뗀다.


"내가 있던 세계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함께 움직이는 발에 시선을 둔 채다. 전사는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으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모습에 잠시간 의아함을 느끼나, 잠시 끊어졌다 이어지는 말소리와 낌새를 눈치챈 듯 조금 더 힘 있게 당겨오는 여인의 몸짓에 다시금 잡념을 버린다.


"어떤 세계에는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특별한 날이 있다고 누군가에게 들은 기억이 있어."
"... 일종의 미신인가?"
"그렇겠지. 어떻게 죽은 자가, 그것도 단 하루만 골라서 돌아오겠어."


여인의 말에 전사가 고개를 짧게 주억인다. 동의의 의미였다.


"사라진 이들을 그렇게나마 추억하고 더 나아가 다시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모여 만들어진 미신이 아니고서야."


이미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도 없을 텐데 말이지. 드물게 여인이 약간의 웃음기를 띤 채 말을 마친다. 그러나 그리워한다는 감정의 의미조차 잘 알지 못하는 전사는 여인이 왜 웃음을 짓는 건지도 모르고 순간 깊은 생각 속에 잠긴다. 덕분에 스텝이 꼬여버렸지만 곧 여인이 그 발걸음에 맞춰왔다.
다시 구둣발 소리만이 왈츠를 가득 채운다. 어째서 지금 이 순간, 이런 공간 한가운데서, 이 둘만이 서로 가슴을 맞댄 채 춤을 추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여인도 전사도 알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어색한 상황인데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마치 지금 여기서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은 이 세계의 존재마저 잊을 것처럼 서로의 몸짓에 매진한다.
 
그러나 황홀의 순간은 쉬이 깨지기 마련이다. 여인부터 점차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못해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다. 여인은 전사의 어깨에 올렸던 팔을 내리고, 깍지를 꼈던 손을 푼다. 그에 따라 여인을 붙잡고 있던 전사의 손도 내려간다.


"▒▒▒▒▒."


어떤 동료도 기억할 리 없고 그 자신조차 기억해내지 못할 전사의 이름을 여인이 부른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전사는 그것이 자신의 이름임을 알아차린다. 대답 대신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시야에 안개가 낀 듯 뿌옇다.


"정말 쓸모없는 질문이지만, 너는 만약 내가 사라진다면 나를 그리워할 건가?"
"질문의 목적을 모르겠군."
"변덕이라고 생각해. 가끔 사람은 이상한 것도 궁금해지기 마련이잖아."


태연한 여인의 말에 전사는 잠시 표정을 찌푸린다. 고민스레 시선을 내리는 전사를 여인은 말없이 기다린다.


"함께 싸웠던 동료이니 그만큼은 그리워할 수도 있겠지."


꽤 긴 간극 끝에 전사가 답을 내놓는다. 애매한 답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면 됐어."


그리곤 몸을 돌려, 어둠을 가로지르며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따라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따라가야만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전사는 여인의 뒤를 쫓으며 말한다.


"어디로 가는 거지?"


그러면 여인은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돌아가야지. 코스모스가 있는 곳으로."
"아아, 그래......"


허나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여인이 향하는 곳에 균열을 빠져나가는 문은 없었다. 그저 끝없는 암흑, 그리고 반짝이는 별들, 그런 것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의문이 피어오르려는 순간 여인이 입을 뗀다.


"돌아가는 건 너뿐이겠지만."


전사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게 무슨...?"


그러나 여인은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네가 나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실망할 생각은 없어. 그래도 잊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네."
"라이트닝."
"왜 그렇게 서있기만 하지? 너는 돌아가야 하잖아."
"라이트닝!"
"새로운 기회가 생기지 않는 이상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두 사람을 지탱하고 있던 바닥이, 감싸고 있던 공간이 무너진다. 전사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인다. 연기처럼 일렁이는 여인의 윤곽에 손을 뻗어보아도 닿지 않는다. 그러나 전사는 분명히 보았다. 흩날리는 별무리 속에서 여인은 입꼬리를 옅게 올린 채 웃고 있었다. 이별의 슬픔과 안도의 기쁨을 동시에 머금은 미묘한 감정에 전사의 눈앞이 아찔해진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아래 잔류하고 있던 여인의 음성이 망연자실하게 울려 퍼진다.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미신이 진짜이길 믿어볼까. 어쩌면 오늘 너와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여인의 말이 형체를 잃고 무너지는 공간 속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려는 듯 황금빛 용이 날아오른다. 두 사람은 각자 성질이 다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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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전사가 눈을 뜬다. 언제나와 같은 질서의 성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기묘한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면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린다.


"당신이 그렇게 오래 잠에 빠지다니, 드문 일이네요. 긴 꿈이라도 꾸었나요?"
"아, 코스모스..."


꿈이라. 분명 어떤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짧은 고민을 접어둔 채 전사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언제 카오스의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한가하게 꿈이나 꾸고 있던 모습이 퍽 우스울 뿐.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꿈의 내용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코스모스 또한 그런 전사의 태도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날짜의 구분도 시간의 흐름도 이미 존재 의의를 잃은 지 오래인 세계. 달빛이 대지를 날카롭게 찌르고 별빛이 그 상처에 파고들듯 반짝이는 것이 명명백백한 밤이었으나, 이제 와서 낮인들 어떻고 밤인들 어떤가?
그런데 오늘따라 전사의 눈에 별빛이 거슬린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면, 낯선 여인의 음성이 귓가를 맴돈다.


"오늘이 그날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잖아? 나야 그 세계의 사람이 아니니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들어본 적 없지만 어째서인지 익숙하고 그리운 음성. 의미를 알듯 말듯한 문장.
하지만 전사는, 명확하지 않은 음성과 문장을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파헤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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